역사
역사
삼국시대
막걸리와 같은 탁주류에 대한 구체적인 명칭과 제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요례를 빚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탁주를 뜻하는 요자가 들어있어 이것을 탁주류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외에도 《삼국지위서동이전》의 ‘고구려가 장양(藏釀 술 빚기, 장 담그기 등 발효음식의 총칭)을 잘한다’는 기록이나 ‘일본 응신천황 때 백제의 인번이라는 사람이 누룩을 써서 술을 빚는 주조기술을 전파했다’는 일본 《고사기》의 기록, 그리고 《해동역사》에 소개된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의 공자시에 나오는 ‘멥쌀로 빚은 신라주’에 관한 기록들을 볼 때 당시의 주조 기술이 주변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우리 민족이 상음한 3대 주종인 청주, 탁주 소주가 완성된 시기로 이전의 삼국시대와 달리 여러 문헌에서 구체적인 술 이름이 등장하여 대략적인 술의 성격을 짐작 할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백주, 《도은집》의 탁주, 《동문선》의 박주 등은 막걸리의 별칭으로 고려시대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어온 것들이며 고급 탁주류의 대명사로 현재 복원되어 상품화된 이화주에 대한 기록도 《동국이상국집》, 《한림별곡》, 《고려사》 등에 나타난다. 또한 북송의 사신 서긍의 기록인 《고려도경》 에 따르면 ‘서민들은 왕의 술을 빚는 사온서에서 나오는 청주와 법주 등의 고급 주류를 얻기 어려워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진하며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는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술의 빛깔이나 도수가 낮은 점 등이 막걸리의 특징과 같아 이 시기에도 역시 탁주류가 서민들의 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가양주 문화의 발달로 양조기술이 더욱 고급화되고 술의 종류도 다양해진 시기이다. 술의 종류와 양조기법들이 기술된 백과사전류의 서적과 고(古) 조리서를 통해 이 시기 술 문화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임원경제지》는 우리 술을 처음으로 분류한 서적으로 여기에서는 170 종의 우리 술을 11가지로 분류하였다. 그 중 막걸리 등의 탁주는 앙료류로 분리되었으며 여기에 속한 술로 이화주, 집성향, 추모주, 백료주, 분국백료주 등을 기록하였다.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동안은 우리 전통주의 암흑기였다. 조선총독부가 세수 확대를 목적으로 만든 주세법(1909년)과 주세령(1916년) 등으로 인해서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은 술을 빚을 수 없게 되어 우리 전통주의 맥을 지켜온 가양주 문화가 말살되었고, 술의 품질을 규격화시켜 조선시대부터 이어오던 우리 술 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막걸리는 별도의 도구가 필요한 소주나 청주와 달리 만들기가 쉽고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민간에서는 밀주로 계속 만들어졌다.

광복 이후
전쟁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정부의 양곡관리법(1965년)에 따른 순곡주 제조 금지령으로 쌀 대신 외국에서 수입한 밀가루를 막걸리의 주원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막걸리는 쌀막걸리에 비해 단맛은 덜하고 신맛이 강하며 빛깔은 밀기울의 함량에 따라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등 이전의 쌀막걸리와는 다른 형태였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60~70년대에는 밀막걸리가 우리 주류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밀막걸리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발효와 숙성이 덜 된 제품을 생산하거나 발효기간을 인위적으로 줄이려는 불량양조업자들로 인해서 막걸리는 점차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90년대 들어 다시 쌀막걸리의 생산이 본격화되었지만 영세한 양조업자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양질의 쌀을 사용하는 대신 품질이 낮은 오래된 묵은 쌀을 사용하거나 밀가루를 섞은 혼합형 막걸리를 생산함으로써 쌀막걸리마저도 시장의 관심을 끄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알코올 도수가 낮고 유산균과 단백질이 풍부한 막걸리가 고급 탁주로 복원되고 다양한 막걸리 제품이 출시되면서 점차 주류시장에서 옛 위상을 찾아가고 있다.
